- Sep 21, 2017
요즘의 찬양대의 찬양은 많은 찬양대 인원들, 파이프 오르간, 그리고 오케스트라 이제는 마이크 시스템으로 더 크고 웅장하게, 그것도 모자라 스크린으로 지휘자와 대원들의 얼굴 하나하나를 보여주는 테크놀로지까지 사용이 된다. 한국교회가 그동안 보여준 더 크게 더 높게 교회를 짓는 것처럼 예배안의 찬양대도 비슷한 현상을 보이고 있다. 찬양대의 사이즈와 악기의 웅장함으로 성도들의 눈과 귀를 압도한다. 그런 웅장함과 화려함에 비해 속을 들여다보면 실제 연주하는 곡은 연습이 많이 필요하지 않은 단순한 멜로디와 단순한 화성의 기법, 그러나 대신 화려한 반주로 곡을 커버하고 있다. 주님께서 크고 화려한 찬양만 받는게 아니라는 건 누구나 다 알고 있다. 그러나 많은 목회자들이 교인 수에 따라 성공한 목회인지 아닌지 판단하는 처럼 지휘자들도 어느덧 많은 인원의 찬양대원들과 오케스트라로 반주하는 것이 선망이 되어가고 있다. 얼마 전 본회퍼의 시에 곡을 붙인 “선한 능력으로”라는 찬양을 듣게 되었다. 교도소라는 절망 속에서도 주님이 함께 하심과 믿음으로 일어날 일을 기대하면서 저녁에도 아침에도 함께 하시는 주님을 찬양하는 그 내용이 참으로 마음에 와 닿았다. 그런데 왜 이 곡이 이렇게까지 나에게 큰 감동이 되었을까? 그건 음악이 주는 가난함 이었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본회퍼의 욕심 없는 마음처럼 음악은 높고 낮음의 격정적 변화도 없으며, 화려한 화성과 리듬도 없는 너무나 단조로운 멜로디와 리듬 그리고 기본 화성뿐이다. 어린아이의 바이올린 소리, 어린이부터 어른이 부르는 단련되지 않은 합창이 가난한 가사와 곡 그리고 연주까지 난 1944년도 감옥 속의 본회퍼의 믿음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우리 찬양대의 찬양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 우리가 지금 가고 있는 이 방향이 누구에게 보이기 위함 인가? 크고 화려하고, 보기에 멋지고, 듣기는 좋지만, 우리는 반문하고 또 반문하면서 우리의 마음을 주님께 두고 주님께서 받으시는 찬양일까에 초점을 맞추어 우리는 행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권춘미